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대숙(大叔), 언부(彦夫). 호는 해화당(海華堂).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으로, 현령 서원(徐遠)의 아들이다. 원천석(元天錫)의 문인이다.
1393년(태조 2)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을 역임하고, 1404년(태종 4) 형조의랑(刑曹議郞) 때 설화(舌禍)로 여흥(驪興)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사헌부장령이 되었으나, 또 계사(啓事)의 잘못으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 죽산(竹山)에 유배되었다. 뒤에 우사간이 되어서도 말을 잘못하여 부평도호부사(富平都護府事)로 좌천되었다.
1415년 우부대언(右副代言)이 되어 동료들과 서얼의 차별대우를 진언하였다. 그뒤 예조우참의, 우대언을 거쳐, 1417년 충청도관찰사가 되고, 1419년(세종 1) 고부 겸 청시부사(告訃兼請諡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한성부윤이 되었다. 그뒤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등의 관찰사와 형조, 예조, 이조의 참판 등 내외직을 지내고, 1427년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1429년 판한성부사로 절일사(節日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1431년 좌군도총제가 되었다. 마음가짐이 굳세고 자신이 맡은 관직에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웠다. 뒤에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공도(恭度)이다.
1393년(태조 2)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을 역임하고, 1404년(태종 4) 형조의랑(刑曹議郞) 때 설화(舌禍)로 여흥(驪興)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사헌부장령이 되었으나, 또 계사(啓事)의 잘못으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 죽산(竹山)에 유배되었다. 뒤에 우사간이 되어서도 말을 잘못하여 부평도호부사(富平都護府事)로 좌천되었다.
1415년 우부대언(右副代言)이 되어 동료들과 서얼의 차별대우를 진언하였다. 그뒤 예조우참의, 우대언을 거쳐, 1417년 충청도관찰사가 되고, 1419년(세종 1) 고부 겸 청시부사(告訃兼請諡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한성부윤이 되었다. 그뒤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등의 관찰사와 형조, 예조, 이조의 참판 등 내외직을 지내고, 1427년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1429년 판한성부사로 절일사(節日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1431년 좌군도총제가 되었다. 마음가짐이 굳세고 자신이 맡은 관직에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웠다. 뒤에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공도(恭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