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강자평(姜子平)
  • 진주강씨(晋州姜氏),  출생~사망 : 1430 ~ 1486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국균(國鈞). 증판서 휘(徽)의 아들이다. 1453년(단종 1) 소과(小科)에 급제하고, 외할아버지의 문음(門蔭)으로 돈령부부승(敦寧府副丞)이 되었다. 1455년(세조 1)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1457년 돈령부승으로서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세자시강원우필선(世子侍講院右弼善)에 초천(超遷)되었다. 이어 장령, 통례문부지사(通禮門副知事),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 성균관사성, 종부시정 등을 역임하였다. 1466년 승정원동부승지에 발탁, 우부승지를 거쳐 이듬해 좌부승지가 되었다가 전명(傳命)을 소홀히 한 사건으로 파직, 1469년(예종 1) 대사간에 복직되었다. 1470년(성종 1) 권맹희(權孟禧)가 구성군(龜城君) 준(浚)이 국왕이 될만하다고 한 말을 들었으나, 이를 고변하지 않은 일로 의금부의 국문을 받고 진해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풀려나고 그 이듬해 고신(告身)을 환급받았다. 1473년 순장(巡將)으로 복직 성주목사로 파견, 1475년에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으로 입조, 다시 진주목사로 나갔다. 이어 형조참의, 대사간,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쳐 1483년 우승지에 올랐으나, 또다시 전명을 소홀히 한 일로 충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으며, 이듬해 형조참의에 서용되고, 1485년 충청도관찰사, 곧 전라도관찰사로 옮겼으며, 이듬해 공조참의에 제수되어 입조하다가 죽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1482년 연산군의 생모 윤비 폐출 때에 승지로서 인수대비(仁壽大妃)의 윤비 폐출 교지를 윤비에게 보였다고 추죄(追罪)되어 직첩을 몰수당하였다. 중종의 즉위와 함께 직첩을 환급받았고, 좌찬성 겸 홍문관대제학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