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문신. 아버지는 찬성사 근(近)이며, 형은 우찬성 제이다. 1427년(세종 9) 공신의 아들로서 감찰에 기용되어 1430년에는 호조좌랑이 되었다. 이때 공법(貢法)의 제정에 있어 척박한 산전(山田)은 매년 경작할 수 없는데, 평야지대의 전답과 같이 논한다면 폐단이 크므로 수령에게 밭주인의 신고를 받아 직접 그 경작여부를 답사한 연후에 조세를 거두도록 건의하였다. 1434년 종부시판관으로 진구현황(賑救現況)을 살피기 위하여 강원도와 함길도에 파견되었다. 돌아와 지평이 되고, 1450년(문종 즉위년) 음죽현감을 거쳐 1452년(단종 즉위년)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역임하였다. 1453년 우승지로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에 협력하여 정난공신 2등에 책록되고 대사헌에 올랐다. 1455년 안천군(安川君)에 봉해지고 한성부윤, 이조참판 등을 거쳐 세조의 즉위와 함께 형조판서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고명사은 겸 세자책봉주청부사(誥命謝恩兼世子○封奏請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에 호조판서, 함길도관찰사, 1459년에 지중추원사를 역임하였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두 조카인 남(擥), 경(擎)과 함께 협력하여 모두 공신에 책봉되고 판서 직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