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문신. 아버지는 좌찬성 제이며, 남(擥)의 형이다. 1432년(세종 14) 음보로 겸상서녹사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환관 이촌(李忖)에게 입양되었는데, 이촌이 죽은 뒤 이촌의 처 이묘안(尼妙安)과 재산을 다툰 일이 있었다. 1450년 양주부사로 나갔다가 곧 판사제감사에 체직되었다. 1456년(세조 2) 상호군 겸 판통례문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동부승지에 발탁되고, 곧 우승지가 되었다. 1459년 인수부윤(仁壽府尹)으로 이조참판 조석문(曺錫文)과 같이 명나라에 가서 파저강(婆猪江)부근의 여진족 이만주(李滿住), 고납흡(古納哈) 등의 간청과 그들의 변방침입을 염려하여 부득이 내왕을 허락하고 수직(授職)하였음을 아뢰고 왔다.이 공로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으며, 그해 공조참판, 개성부유수,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462년 첨지중추원사가 되고, 1468년 동지사를 거쳐 1470년(성종 1) 상호군에 전직하였다. 시호는 양평(良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