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문신. 아버지는 계성(季誠)이다. 1427년(세종 9)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7년 문음(門蔭)으로 충훈부사승(忠勳府司丞)에 제수, 이후 전농시직장(典農寺直長), 한성부중부령(漢城府中部令), 감찰 등을 지냈다. 병조좌랑 재직중 부사직(副司直) 이보흠(李甫欽)을 사직에 잘못 승수(陞授)시킨 사건에 연루되어 논죄되었으나 공신자손이라 하여 파직에 그쳤다. 그뒤 복직되어 봉상시판관, 병조정랑, 장령, 개성부단사관(開城府斷事官) 등을 지냈다. 1455년(세조 1)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2등에 책록되었고, 이어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를 거쳐 형조참의, 동부승지, 도승지, 이조참판, 경기관찰사, 한성부윤 등을 지냈다. 1464년 대사헌, 1469년(예종 1)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그뒤 복직하여 개성부유수, 판한성부사,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476년(성종 7) 지중추부사로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재직중 뚜렷한 업적은 없으나 시사(詩詞)에 능통하여 명성이 높았고 세조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시호는 공호(恭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