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김맹성(金孟盛)
  • 경주김씨(慶州金氏),  출생~사망 : 1374 ~ 1449
조선 초기의 문신. 아버지는 계림군(鷄林君) 균이다. 개국공신의 아들로서 음보(蔭補)로 관직에 올라 1408년(태종 8) 장령이 되었는데, 무고죄인(誣告罪人)의 처형에 풍헌관(風憲官)으로서 책임을 지고, 집의 탁신(卓愼), 지평 이소축(李小畜)과 함께 파직, 보주(甫州)에 유배되었다. 1420년(세종 2)에 다시 기용되어 집의가 되고, 1423년 우부대언, 1424년 우대언, 1425년 우대언 겸 지형조사(右代言兼知刑曹事), 1426년 호조참판 등을 거쳐 1427년 대사헌이 되었다. 그해 흉년이 들어 재해가 혹심하자 실농(失農)한 각 고을의 조세를 감면할 것, 각 도에 조관(朝官)을 파견하여 농민의 질고를 위로할 것, 풍년이 들 때까지 경외(京外)의 영선(營繕)을 금할 것, 변방 방어에 특별히 공이 많은 자를 등용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한 구황책(救荒策)을 올렸다. 1428년 형조참판으로서 분용미(分用米)를 추징하지 않은 책임으로 회인(懷仁)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 경창부윤(慶昌府尹),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를 거쳐 1430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31년 이조참판, 함길도도관찰사, 1433년 중추원부사가 되고 그해 사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 공조좌참판을 역임하였다. 1433년 황해도관찰사, 1434년 인수부윤(仁壽府尹), 1435년 경기도관찰사, 1437년 호조참판, 1438년 이조참판 등을 거쳐 1439년에는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이어서 호조판서와 지중추원사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단의(端懿)하고 일을 빈틈없이 처리하였다. 시호는 희경(僖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