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문신. 사평 갱의 아우이다. 1431년(세종 13) 종마관압사(種馬管押使)로 북경(北京)에 다녀왔으며, 뒤에 집현전교리를 거쳐 1445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가 되었다. 1448년 중추원부사에 이르렀다가, 1450년(문종 즉위년) 사은사(謝恩使)로 이견기(李堅基)와 함께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1455년(단종 3) 단종이 양위하자 셋째형 숙(叔)과 함께 남해에 귀양살이를 하다가, 1468년(세조 14) 10여년 만에 풀려났다. 이듬해 숭록대부(崇祿大夫)에 가자(加資)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양주의 서산(西山)에 은거하여 문을 닫고 왕실을 걱정하면서 매일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가 병으로 죽었다. 일찍이 세종 때 상호군으로 함길도성기간심사(咸吉道城基看審使)가 되어 용성과 길주 읍성의 이설지를 시찰한 일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