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문신. 광성군(光城君) 겸광(謙光)의 넷째아들이고, 좌찬성 극핍(克○)의 동생이며,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국광(國光)의 조카이다. 문음으로 진출하여 병조정랑에 임용되고, 이어서 사헌부지평, 사간원사간, 사도시부정(司導寺副正)을 지내고 4년 만인 1522년(중종 17)에 승정원에 들어갔다. 이에 대간들은 그와같은 특별 발탁은 불가하다고 서용(敍用)을 거부하며 탄핵하였다. 그러나 임금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져 우승지, 좌승지를 역임하고 1527년 도승지에 올랐다. 이어서 개성유수를 거쳐 이듬해에는 경기관찰사가 되어 민정을 주관하였다. 이어서 다시 내직으로 옮겨 형조참판이 되었으나, 이때 작서사건(灼鼠事件)이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김안로(金安老) 일파에게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