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문신, 의관. 자는 취지(聚之). 아버지는 좌찬성 훤(煊)이다. 1462년(세조 8) 사마시에 합격하고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에 임명되었고, 그뒤 의방을 넓게 연구하여 의업에 정통하였다. 1466년 내의원주부 겸 의학교수, 감찰을 역임, 1467년 공조좌랑으로 있을 때 왕손의 질병을 고친 공으로 2계(二階)를 초자(超資)받으면서 종친부전부 겸 의학교수에 승진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년)에 세조의 시병(侍病)에 대한 노고로 세조의 유촉에 의하여 초계(超階)되고, 예종의 시빈(侍殯)과 남이(南怡)의 옥사에 끼친 공으로 수충정난익대공신(輸忠定難翊戴功臣) 3등에 책봉되었다. 같은해 통훈대부에 오르면서 행사섬시첨정, 1469년 절충장군행호군, 1470년(성종 1) 가선대부에 오르면서 현복군(玄福君)에 봉해졌다. 1477년 성종의 병 치료 및 한계희(韓繼禧)와 '의서유취 醫書類聚'를 간행한 공로로 자헌대부에 승진되었다. 1478년 아버지의 상중에 기복(起復)하였고,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시질(施疾)에 대한 노고로 또다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으며, 1479년 어머니 상중에 다시 기복하였다. 1483년 현복군으로서 약방제조(藥房提調)를 겸임하다가 공조판서에 발탁되었다. 그뒤 ' 의업(醫業)에 있는 사람은 육경(六卿: 判書)에 합당하지 않다.'는 대간의 상소가 계속되었으나 성종의 신임으로 유임되었다. 성품이 성실하여 종족을 화목하게 하였고, 신분을 가리지 않고 치료에 전념하여 제활(濟活)한 바 많았다. 시호는 정순(靖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