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비천(泌川), 동고(東皐). 장령 율(栗)의 아들이며, 참판 노(○○)의 아버지이다. 1588년(선조 21)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학유, 군자감참봉을 거쳐 승문원주서가 되어 사관을 겸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좌랑으로 분조(分朝)를 배종(陪從)하고, 순찰사 종사관이 되어 해서의 군량을 담당하였다. 그뒤 사간원정언, 예조좌랑을 지내고, 1596년 해서독운어사(海西督運御史)가 되었다가 돌아와 홍문관교리가 되었다. 1599년 이이첨(李爾瞻), 홍여순(洪汝諄) 등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탄핵하였다가, 이로 인하여 남이공(南以恭), 김신국(金藎國)과 붕당을 만든다고 탄핵받아 관작을 빼앗기고 여주에서 8년간 은둔하였다. 1607년 대사령(大赦令)으로 복직되어 장악원첨정이 되고 부응교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우부승지, 호조참의, 부제학, 다음해 형조참의, 이조참의, 충청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뒤 첨지중추부사, 담양부사, 이조참판, 동지성균관사, 도총부부총관 등 여러 관직을 지내고, 1613년 폐모론이 대두된 뒤 여러 차례 대북파를 탄핵하다가 1615년 '국법을 무시하고 오직 자기의 당파인 소북파만 감싸고 동료들의 의견을 무시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뒤에 서반직으로 복직, 영광군수로 나갔으나 전라도관찰사 이창준(李昌俊)의 탐학에 실망하여 병을 핑계하고 사직하였다. 그러나 다시 복직되어 1620년 진위사(陳慰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져 죽었다. 이덕형(李德泂)과 친교가 깊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초명은 문서, 자는 서오(敍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