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중명(李重溟)
  • 전주이씨(全州李氏)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구주(鷗洲). 경녕군(敬寧君)의 후손으로 문장이 뛰어나 강화향교 비문을 지었다. 1601년(선조 34)에 정과에 급제하였다. 1618년(광해군 10)에 교관(敎官)으로 있을 때 인목대비(仁穆大妃) 폐위정청(廢位庭請)에 참여하였다. 인조반정 이후에 한성판관(漢城判官) 까지 이르렀다. 1630년(인조 8) 정시에서 7등급인 삼상이 되어 회시(會試)를 바로 보았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서울 철수령이 내려져 고향인 강화로 피난했다. 그러나 청나라 군사가 강화성을 함락하자 김상용(金尙容) 등은 자결하고, 봉림대군(鳳林大君) 등 비빈 종친이 사로잡히게 되는 것을 보고 오랑캐에 사로잡히느니 죽음을 택하겠다며 둘째 아들 이증(李○)과 함께 집에서 조용히 자결했다. 슬하에 이익(李翊), 이증, 이분(李○) 삼형제를 두었다. 그 중 둘째 이증은 1633년(인조 11) 계유식년사마시(癸酉式年司馬試)에 진사(進士) 2등으로 합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