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가정(稼亭). 장령 석번(碩蕃)의 동생이다. 인조 때 진사에 올라 벼슬이 시직(侍直)에 이르렀다. 1650년(효종 1) 유직(柳稷)과 함께 성리학에 있어서 이황(李滉)과 이이(李珥), 성혼(成渾)이 차지하는 학문적 위치에 대하여 논쟁한 사건으로 유명하다. 상소를 통하여 전개된이 논쟁의 초점은 유직이 이황을 절대시하면서 이이, 성혼이 이황의 학설에 비판적이었음을 비난한 데 대하여, 그는 이황이 조선의 주돈이(周敦○), 정이(程○) 라면 이이, 성혼은 주희(朱熹), 장재(張載)에 해당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이이, 성혼의 학문적 위치를 중시한 것이었다. 효종은 양쪽의 주장이 학문적 논쟁을 지나쳐 사적인 감정대립으로 발전하였다 하여 논쟁 자체를 무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같은해 7월 경상도 유생들이 신석형을 지지하면서 전원 과거에 응시하지 않는 시위를 벌이자, 효종은 경상도 수령들을 통하여 유생들을 효유, 진정시켜 사건을 일단락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신석형의 문장행의(文章行誼)가 사림의 모범이 되고, 상주의 운계서원(雲溪書院)에 배향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