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형조참판 응현(應賢)의 아들이다. 할아버지 치운(致雲) 으로부터 3대가 대대로 참판을 지냈다. 1504년(연산군 10)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고, 뒤에 무과에도 급제하였다. 1508년(중종 3) 홍문관에 들어갔고, 1515년 평사를 거쳐 1517년 왕의 명으로 3계급을 뛰어 승진하였으며, 1519년 승지로 발탁되어 왕의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이어 1521년 승지, 우승지가 되어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보필에 진력하였다. 잠시 참찬관을 역임한 뒤 장례원 판결사, 가승지를 거쳐, 다시 우승지가 되어 왕의 측근이 되었다. 이듬해 좌승지에 오르고, 1523년 제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자 왕은 그를 다시 근무 조건이 좋은 충청도병사를 제수하였다. 1527년 중앙으로 돌아와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한 뒤 경연관이 되어 왕에게 경서를 강론하였다. 얼마 뒤 황해도관찰사로 나갔고, 1528년 하정사, 정조사 로, 이듬해는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30년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형조참판이 되었고, 1534년 다시 강원도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으며, 그해 공조참판이 되어 중앙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유장(儒將)으로 뽑혀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인정받았고, 또한 왕을 호종한 뒤 오언율시를 지어 올려 상으로 활이 하사될 만큼 시재(詩才)에도 뛰어났다. 특히 그는 제조(提調)로 재임할 때 자격루(自擊漏)를 편리하고도 정확하게 개조(改造)한 공이 크다. 호는 매창(梅窓). 자는 개지(介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