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희지(禧之). 아버지는 충손(衷孫)이다. 일찍이 진사가 되고 1495년(연산군 1)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교서관부정자가 되고, 이어서 정자를 거쳐 1501년 정언, 1504년 지평을 역임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연산군 아래에서 벼슬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청맹(靑盲)이라 일컫고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듬해 헌납에 기용되어 민간의 가사(家舍)를 탈취한 권령(權齡), 수령으로 재임 때 남형(濫刑)과 징렴(徵斂)을 일삼은 박세준(朴世俊), 가동(家○)을 보내어 외방 수령을 징색(徵索)한 정세명(丁世明) 등을 추국(推鞫)하여 파직할 것을 청하였다. 또, 시폐를 논하고 정지(定志), 중작(重爵), 납간(納諫), 절용(節用), 친현사(親賢士), 원참녕(遠讒○), 흥학교(興學校), 정사습(正士習), 억환자(抑宦者), 보외척(保外戚), 명상벌(明賞罰), 휼민(恤民) 등 12조를 헌의(獻議)하였다. 그해 성균사예로서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 사간이 되어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대한 논상(論賞)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1515년(중종 10)집의, 이듬해 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