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희율(希栗). 호는 금이(琴易). 응두(應斗)의 손자로, 윤복(胤福)의 아들이다. 1602년(선조 35)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607년 회답사 여우길(呂祐吉) 일행의 일본사행에 서장관으로 다녀왔다. 1613년(광해군 5) 사헌부지평 때 영창대군을 죄주자는 주장을 맨 처음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1614년 군자감정으로 있을 때 정온(鄭○)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에 대하여 부당함을 상소하였다가 논죄되자, 정온의 죄를 가벼이해줄 것을 상소하였다가 파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