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희용(希容). 호는 효창노인(曉窓老人). 사인(舍人) 순문(順門)의 아들이며, 영의정 연원(連源)과 좌의정 통원(通源)의 동생이다. 어려서는 악동들과 어울려 놀기를 즐겼으나, 나이가 들면서 깨닫고 공부에 힘써 20세에 성균관에서 학문을 익혔다. 1537년(중종 3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가 되어 의정부사록(議政府司錄)을 겸하였다. 이듬해 탁영시(擢英試)에 병과로 발탁되어 사과(司果)에 제수되었고, 그뒤 사간원정언을 거쳐 인종이 즉위하자 사헌부헌납이 되어 경연에서 기묘사화 때 억울하게 처단된 조광조(趙光祖)의 신원을 진언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소윤(小尹)의 편에 서서 대윤(大尹)의 거두인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등을 탄핵, 숙청하였다. 이어서 사헌부장령, 홍문관교리, 사간원사간, 성균관사예, 홍문관전한 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553년(명종 8) 승정원에 들어가 왕의 측근에서 오랫동안 보필하였다. 그뒤 예조참의, 동지돈령부사를 역임하다가 노환으로 사임하였다. 음률(音律), 의술(醫術), 서법(書法)에도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