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김영조(金榮祖)
  • 풍산김씨(豊山金氏),  출생~사망 : 1577 ~ 164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효중(孝仲). 호는 망와(忘窩). 산음현감 대현(大賢)의 아들이며, 김성일(金誠一)의 사위이다. 9형제 중 5명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1601년(선조 34)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2년(광해군 4)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거쳐 전적에 승진하였으나, 당시 혼란한 정치를 보고 10여년간 은거생활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복관되어, 정언, 지평, 부수찬, 장령, 대사헌, 대사성, 대사간, 부제학,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여섯 차례나 어사로 나갔다. 1624년에 지평으로 있으면서 대사헌 정엽(鄭曄), 대사간 이현영(李顯英) 등과 함께 인성군(仁城君) 공(珙)이 이괄(李适)의 난에 간여하였다고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1625년에 장령으로 있으면서 목성선(睦性善)의 상소내용이 경망하다 하여 처벌할 것을 주장하고, ' 인성군 공은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모할 때 동조하였고, 또 이괄의 난에 내응하여 자식과 신하의 도리를 벗어났으니 처형해야 마땅하다.'고 또다시 주장하였다. 1633년에는 세자책봉을 주청하기 위해 주청사(奏請使) 한인급(韓仁及)과 함께 부사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그 공로로 노비 3구와 토지 10결을 하사받았다. 1642년에 이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취재(取才)때 인사 부정이 있었다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그의 생애를 보면 특별히 모나지 않았고 체구가 작았으며 단정하였다. 영천의 구산정사(龜山精舍)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망와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