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박승종(朴承宗)
  • 밀양박씨(密陽朴氏),  출생~사망 : 1562 ~ 162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효백(孝伯). 호는 퇴우당(退憂堂). 판서 계현(啓賢)의 손자이고, 안세(安世)의 아들이다. 1585년(선조 18)에 진사가 되고, 다음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89년 봉교(奉敎), 이어 지제교(知製敎), 병조정랑을 역임하고, 1600년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갔다. 1604년 부제학, 1607년 병조판서, 1610년(광해군 2) 형조판서를 거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고, 1618년 우의정으로 도체찰사(都體察使)를 겸하였다. 이어 좌의정이 되고, 이듬해 영의정에 올라 밀양부원군(密陽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상위(相位)에 오르자 항상 차고 다니는 주머니 속에 오리알만큼 큰 비상을 넣어두고 말하기를 '불행한 시대를 만나 조석으로 죽기를 기다리는데 어찌이 물건이 없어서 되겠느냐. ' 하고 번번이 진정하지 못하고 고요한 방안에 한가히 있으면서 흐느껴 울고는 하였다. 앞서 1612년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로 윤인(尹○), 이인경(李寅卿) 일당이 경운궁에 난입,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죽이려 할 때 일신의 위협을 돌보지 않고 수위(守衛)하기를 한결같이 하여 불측한 변을 방비하였으며, 정청(庭請)하는 날에도 끝까지 불참하였고, 1617년 폐모론(廢母論)이 제기되자 극력 반대하였다. 늘 나라일을 생각하며 폭음을 하고 말하기를 '내가 술을 즐겨함이 아니고 속히 죽기를 원하여 그러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 시를 짓기를 '한 말로 임금을 깨우칠 수 없고, 만번 죽어 은혜에 보답하여도 오히려 남음이 있겠네. ' 하였는데, 이 시가 한때 전송(傳誦)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미처 일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황급히 성문을 나갔으나 군사를 모으려는 아들의 행동을 중지시키고, 아들 자흥(子興)의 딸이 광해군의 세자빈(世子嬪)으로서 그 일족이 오랫동안 요직에 앉아 권세를 누린 사실을 자책하여, 아들과 같이 한낮에 목매어 자결하였다. 반정 후 관작이 삭탈되고 가산이 적몰되었으나,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시호는 숙민(肅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