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회이(晦而). 호는 죽소(竹所). 형조참판 휴암공(休菴公) 상준(尙寯)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현감(縣監) 천우(天祐)의 딸이다. 부인은 정경부인(貞敬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이며, 찬성(贊成) 이직언(李直彦)의 딸이다.
1606년 진사시에 제1인으로 합격하고, 같은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배속되었다가 검열, 대교, 봉교를 거쳐 병조좌랑, 정언, 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611년(광해군 3) 다시 정언이 되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는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에 아버지와 함께 연루되어 국문을 받았으나 곧 풀려났으며, 1617년 폐모논의를 위한 정청(庭請)에도 참가하지 않아 삭직되자 고양(高陽)에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후 복관되어 고산찰방(高山察訪), 고원군수(高原郡守), 판교(判校), 홍주목사(洪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1633년(인조 11) 양서관향사(兩西管餉士)로 국가재정의 확보에 큰 공을 세웠다. 1641년 황해도관찰사로 나갔고, 경직에 돌아와 병조참의가 되었으며, 1644년 부승지 겸 세자빈객으로 세자를 모시고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도승지, 병조참판, 호조참판을 거쳐 경기감사로 나가 수원부사 변사기(邊士紀)의 모역사건을 밝혀냈다. 효종 즉위 후 개성유수에 보임되었으며, 동지사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고, 지중추부사 겸 판의금부사를 거쳐 우참찬에 올랐다. 문예와 글씨에 뛰어났으며, '장릉지장 長陵誌狀'을 찬하였다. 저서로는 '죽소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656(효종7) 병신(丙申)년 4월 24일 졸하였고, 묘(墓)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307번지 합장이다.
1606년 진사시에 제1인으로 합격하고, 같은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배속되었다가 검열, 대교, 봉교를 거쳐 병조좌랑, 정언, 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611년(광해군 3) 다시 정언이 되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는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에 아버지와 함께 연루되어 국문을 받았으나 곧 풀려났으며, 1617년 폐모논의를 위한 정청(庭請)에도 참가하지 않아 삭직되자 고양(高陽)에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후 복관되어 고산찰방(高山察訪), 고원군수(高原郡守), 판교(判校), 홍주목사(洪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1633년(인조 11) 양서관향사(兩西管餉士)로 국가재정의 확보에 큰 공을 세웠다. 1641년 황해도관찰사로 나갔고, 경직에 돌아와 병조참의가 되었으며, 1644년 부승지 겸 세자빈객으로 세자를 모시고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도승지, 병조참판, 호조참판을 거쳐 경기감사로 나가 수원부사 변사기(邊士紀)의 모역사건을 밝혀냈다. 효종 즉위 후 개성유수에 보임되었으며, 동지사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고, 지중추부사 겸 판의금부사를 거쳐 우참찬에 올랐다. 문예와 글씨에 뛰어났으며, '장릉지장 長陵誌狀'을 찬하였다. 저서로는 '죽소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656(효종7) 병신(丙申)년 4월 24일 졸하였고, 묘(墓)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307번지 합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