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김광현(金光炫)
  • 안동김씨(安東金氏),  출생~사망 : 1584 ~ 1647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회여(晦汝). 호는 수북(水北). 신천군수(信川郡守) 김생해(金生海)의 증손으로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김극효(金克孝)의 손자이며,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의 둘째 아들이고,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좌랑(左郞) 권개(權愷)의 딸이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청송심씨(靑松沈氏)이며, 진사(進士) 심율(沈慄)의 딸이다.

1612년(광해군 4) 생원, 진사 양과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비판하며 관직에 나가지 않고 있다가,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숨은 인재로 뽑혀 연원도찰방(連源道察訪)을 제수받았다. 그러나 부임하기 전, 1625년(인조 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 및 홍문관부정자, 검열, 정언을 거쳐 이괄(李适)의 난 및 유효립(柳孝立)의 역모사건 때 영사공신(寧社功臣) 1등에 책봉되었으나 뒤에 개훈(改勳)때 삭제되었고, 1626년 수찬, 교리, 암행어사를 거쳐 1627년 정묘호란 때 호조판서 심열(沈悅)의 종사관으로 기읍(畿邑)에 파견되어 기민구제에 힘썼으며, 사간, 응교, 대사헌, 대사간, 예조참의를 거쳐 1634년 부제학이 되었다. 이때 대사간 유백증(兪伯曾)이 인조의 사친추숭(私親追崇)을 옹호함을 임금에게 아부한다 하여 탄핵하다가 삼수(三水)로 유배당하였다. 다음해 재이(災異)가 빈발함을 이유로 방면되어 돌아왔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그의 아버지 상용이 강화로 피난하였다가 강화가 함락당하매 그곳에서 자살하자, 그도 홍주의 오촌동(鰲村洞)에 은거하였다. 조정에서 그 호종(扈從)의 공을 수록하고 대사간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다시 청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모든 문서에 청나라 연호 쓰기를 거부하고 단지 간지만 씀으로써 파직당하였다. 그뒤 이조참판을 배수하였으나 사직하였다. 1646년 소현세자 빈 강씨의 옥이 일어나 강씨가 사사되자, 강빈의 오빠 문명(文明)이 그의 사위였던 까닭에 순천부사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그곳에서 울분 끝에 죽었다. 전서(篆書)와 해서(楷書)를 잘 썼으며, 글씨로는 홍천에 있는 '홍양청난비 洪陽淸難碑' 및 통진에 있는 '민기신도비 閔箕神道碑'와 '영상이탁묘비 領相李鐸墓碑'가 있다. 시문집으로 '수북유고' 4권이 전한다.

1647년(인조25) 7월 23일 졸하였고, 묘(墓)는 충남 홍성군 갈산면 오두리 부인과 합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