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행원(行遠). 호는 능허(凌虛).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대학'과 '심경 心經'을 배울 때 정구는 그의 기국이 충후함을 인정하여 제자들에게 그를 스승으로 삼을 것을 말하고는 하였다. 그뒤 장현광(張顯光)을 만나 역리(易理)를 의논할 때 장현광은 그의 높은 학문에 감탄하였다. 또한, 정인홍(鄭仁弘)을 만나보고 스승인 정구에게 정인홍을 멀리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모두 그의 말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를 못마땅히 여기게 되었다. 인조반정 후 진사가 되었고, 이원익(李元翼)이 천거하였으나 등용되지 못하였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주군(州郡)이 창의(倡義)하여 그를 강우의병장(江右義兵將)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의병을 거느리고 상주에 이르렀으나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갔다. 기자헌(奇自獻)이 그를 찾아가 강상(江上)에서 낚시질하다가 시 한수를 지어주었는데, '천지에 눈보라치니 모든 풀은 시들었는데, 그대의 마음은 대나무같이 푸르도다. '라고 하여 그의 철석 같은 절의를 나타내었다. 장현광, 김우옹(金宇○), 허목(許穆), 정온(鄭蘊)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죽은 뒤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진주 정강서원(鼎岡書院)과 정산(鼎山) 향현사(鄕賢祀)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