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학로(學魯). 첨정(僉正) 충우(忠佑)의 손자이며 훈련원정(訓鍊院正) 치공(致恭)의 아들로, 찰방 치안(致安)에게 입양되었다. 1625년(인조 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에 보직되었고 뒤에 승정원주서, 사섬시직장, 전적, 형조좌랑, 병조좌랑 겸 기사관을 지냈다. 함평현감(咸平縣監)으로 나아가 학문의 진흥에 힘썼으며,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그뒤 다시 병조정랑, 성균관직강, 예조정랑 겸 기주관, 제천현감(堤川縣監)을 거쳐 통례원상례 겸 편수관, 지제교(知製敎), 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1646년 강빈옥사(姜嬪獄事)에 연루되어 파직, 고향에 내려가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뒤 효종이 즉위하자 다시 등용되어 고성현감, 정언, 좌우통례(左右通禮), 승문원판교, 영해부사 등을 지냈다. 1666년(현종 7) 승지로 경력(經歷), 참찬관(參贊官), 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을 겸하다가 노병(老病)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평시에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성(性)이며, 효제충신(孝悌忠信)은 도(道)라 하였으며, 성은 마음의 이치에서 구하는 것이며, 도는 몸이 마땅히 행할 바의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정묘호란 때는 항복하지 말고 대항하여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