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유명뢰(兪命賚)
  • 기계유씨(杞溪兪氏),  출생~사망 : 1652 ~ 1712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필경(弼卿). 호는 자교당(慈敎堂). 조부 유성증(兪省曾)은 관찰사(觀察使)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아버지 유황(兪榥)은 관찰사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은진송씨(恩津宋氏)로 직장(直長) 송시욱(宋時煜)의 딸인데 아버지의 후처(後妻)이다. 세상을 일찍 떠난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머니는 '소학(小學)'과 '통감(通鑑)' 등을 직접 가르쳤는데 후에 그는 양산(楊山)에 집을 짓고 '자교당(慈敎堂)'이라는 당호를 지었다. 17세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우암의 문인이었던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와 직재(直齋) 이기홍(李箕洪) 등과 교유하였다. 1674년(현종 15) 갑인예송(甲寅禮訟)으로 나라 안이 어수선해지자, 그는 집안 식구들을 데리고 단양(丹陽)으로 내려가서 유유자적하였으며, 또 서인이 예송에서 패배함으로써 우암이 봉산(蓬山)으로 유배되자 찾아가 성리학(性理學)을 배웠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우암이 사약을 받고 죽자, 빈객을 사절하고 스스로 정도를 지켰다. 이때 '말을 조심하라'는 뜻의 마두견(磨兜堅)을 자신의 자리에 손수 썼다. 1694년(숙종 20) 귀가 먹어 스스로 폐인이 되고는 세상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였다. 1710년(숙종 36) 사산감역관(四山監役官)을 제수 받았지만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사부(詞賦)를 공부하여 굴원(屈原)과 송옥(宋玉)의 유풍이 있었으며, 만년에는 '주자대전(朱子大全)',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등을 좋아하여 탐독하였다. 또한 평소에 '소학(小學)'과 '가례(家禮)' 두 책을 강론하였다. 1712년(숙종 38) 4월 4일, 회갑이 되는 해에 서울의 집에서 별세하여 포천(抱川)의 천주산(天柱山) 신륵사(神勒寺)의 옛터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반남박씨(潘南朴氏)로 승지(承旨) 박세성(朴世城)의 딸이다. 4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진사(進士)인 유광기(兪廣基), 유하기(兪廈基)와 유도기(兪度基), 유응기(兪應基)가 있으며 딸은 진사 조정빈(趙鼎彬)에게 시집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