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태고(太古). 호는 양재(養齋), 하의자(荷衣子). 인우(仁祐)의 아들이며, 판서 진(進)의 동생이다.
1572년(선조 5) 진사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정자(權知承文院正字)가 되었다가 곧 사관(史官)이 되었다.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 한 뒤 1574년 정자로 홍문관에 들어가 10년 동안 봉직하였다. 1577년 부수찬에 오르고, 예조, 병조의 좌랑을 거친 뒤 지제교를 겸하였다. 1580년 예조정랑이 되고, 이듬해 병조정랑으로 옮겼다가 곧 경기암행어사가 되어 민정을 살폈다. 그뒤 교리, 수찬을 지내고, 1583년 정언이 되었다. 이해 양사(兩司)에서 이이(李珥)를 탄핵하자, 이것을 반박하다가 장연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588년 병조정랑이 되었으며, 이듬해 교리, 검상을 지낸 뒤 사임이 되었다가 그해 겨울에 집의가 되었다. 경학(經學)에 밝고 논사(論思)를 잘하여 홍문관에서 '학사전재(學士全才)'라 불렸으며, 시문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썼다. 저서로는 '하의집', '하의시십 荷衣詩什'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시조 한 수가 전한다.
1572년(선조 5) 진사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정자(權知承文院正字)가 되었다가 곧 사관(史官)이 되었다.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 한 뒤 1574년 정자로 홍문관에 들어가 10년 동안 봉직하였다. 1577년 부수찬에 오르고, 예조, 병조의 좌랑을 거친 뒤 지제교를 겸하였다. 1580년 예조정랑이 되고, 이듬해 병조정랑으로 옮겼다가 곧 경기암행어사가 되어 민정을 살폈다. 그뒤 교리, 수찬을 지내고, 1583년 정언이 되었다. 이해 양사(兩司)에서 이이(李珥)를 탄핵하자, 이것을 반박하다가 장연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588년 병조정랑이 되었으며, 이듬해 교리, 검상을 지낸 뒤 사임이 되었다가 그해 겨울에 집의가 되었다. 경학(經學)에 밝고 논사(論思)를 잘하여 홍문관에서 '학사전재(學士全才)'라 불렸으며, 시문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썼다. 저서로는 '하의집', '하의시십 荷衣詩什'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시조 한 수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