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한응인(韓應寅)
  • 청주한씨(淸州韓氏),  출생~사망 : 1554 ~ 161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졸재(百拙齋), 유촌(柳村). 부사직(副司直) 경남(敬男)의 아들이다. 1576년(선조 9) 사마시를 거쳐, 이듬해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뽑혔고, 곧이어 승정원주서, 예조좌랑, 병조좌랑, 지평, 정언을 지내고, 1584년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성균관직강을 거쳐, 1588년 선천군수로 부임하여 이듬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적발, 그 공으로 호조참의가 되고, 이어 도승지가 되었다. 1590년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에 오르고, 정여립 모반을 고변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591년 예조판서에 승진하여 진주사(陳奏使)로 다시 명나라에 들어가 일본의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에 길을 빌려 달라는 사실을 고하여 명나라의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게 하였다. 이듬해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왜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개성에 이르자 피난길에 오른 선조를 만나 왕을 따라 다시 평양으로 갔다가, 제도도순찰사(諸道都巡察使)로 임진강 방어에 임하였다. 그러나 가토(加藤淸正)의 유인작전에 속아 전군이 붕괴하자, 왕을 뒤따라 의주의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요동(遼東)에 건너가 원병(援兵)의 급속한 출병을 요구하였고, 12월 이여송(李如松)이 원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자 한어(漢語)에 능한 그는 접반관(接伴官)으로 이여송을 맞이하였다. 이듬해 청평군(淸平君)에 봉해지고, 서울이 수복되자 질서회복에 힘썼으며, 호조판서로서 군량미 보급에 진력하였다. 1595년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다음해 평안감사로서 당시 평안도에 있던 많은 명나라 장병과의 화합을 도모하였다. 1599년 사은사(謝恩使)로 다시 명나라에 정유재란 때의 원군을 사례하고 돌아와서 우찬성에 올랐다. 1600년 이조판서, 다음해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1605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고, 1607년 우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초서(草書)에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백졸재유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