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청원(淸源). 호는 서촌(西村), 쌍백당(雙栢堂). 아버지는 선전관 여개(汝漑)이며, 어머니는 현감 허운(許雲)의 딸이다. 1585년(선조 18)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고 저작 겸 봉상시직장, 검열, 대교, 지평 등을 거쳐 1604년에 정주목사로 나갔다. 그뒤 우승지, 형조, 호조의 참의, 장례원판결사 등을 거쳐 1607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뒤에 개성부도사, 숙천, 동래, 경주부윤 등을 역임하고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일부 명나라 원군들이 약탈을 자행하자 그는 창고의 곡식을 다른 곳으로 은닉시켜 백성들을 보호하는 등 일을 상황에 맞게 임기응변적으로 잘 처리하여 선조 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그는 또한 달천교(達川橋)의 목교(木橋)를 석교(石橋)로 대체하여 민폐를 덜어주었으며, 수로를 개통하여 논을 만들어서 벼농사를 짓게도 하였다. 1616년 해주목사로 있을 때 앞서 1613년의 계축옥사에 관련되어 해서(海西)산곡으로 모여든 도당을 회유하여 돌려보냈는데, 그 가운데 이이첨(李爾瞻)의 일파인 박희일(朴希一), 박이빈(朴以彬)을 무고죄로 처형함으로써 이이첨의 미움을 받아 남형죄(濫刑罪)로 투옥, 고문을 받다가 옥사하고 뒤에 또다시 대역죄로 몰려 부관참시당하였다. 인조반정 후 신원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숙천, 밀양, 정주 등에 송덕비가 세워졌으며, 묘는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