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유홍(兪泓)
  • 기계유씨(杞溪兪氏),  출생~사망 : 1524 ~ 159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지숙(止叔). 호는 송당(松塘). 판서 여림(汝霖)의 손자이고, 생원 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의령남씨(宜寧南氏)로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된 충세(忠世)의 딸이다.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 정자, 전적, 지제교, 지평, 장령, 집의 등 문관요직을 역임하였다. 1557년 강원도암행어사로 나가 민심을 수습하고, 1563년 권신 이량(李樑)의 횡포를 탄핵하였다. 이듬해에 시관(試官)으로 이이(李珥)를 뽑았으며, 1565년 문정왕후(文定王后) 상사 때에는 산릉도감(山陵都監)으로 치산의 일을 맡았으며, 춘천부사가 되어서는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1573년(선조 6) 함경도병마절도사로 회령부사를 겸하였고, 그뒤 개성부유수를 거쳐 충청, 전라, 경상, 함경, 평안도의 관찰사와 한성판윤 등을 역임하면서 치적을 쌓았다. 1587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그동안 조선 왕조의 시조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으며, 1589년 좌찬성으로서 판의금부사를 겸하여 정여립(鄭汝立)의 역옥(逆獄)을 다스렸다. 이러한 공으로 1590년 종계변무(宗系辨誣)1등, 토역(討逆) 2등에 책훈(策勳)되어, 평난공신(平難功臣)호를 하사받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이조판서, 우의정에 승진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였고, 평양 에서는 세자(뒤의 광해군)와 함께 종묘사직의 신위를모시고 동북방면으로 나아가 도체찰사를 겸임하고, 이천(伊川)에서 격문을 여러 도로 보내어 각 도의 의병들을 격려, 지휘하여 방수태세(防守態勢)를 갖추었다. 이듬해에 왜적이 서울에서 물러나자, 먼저 서울에 들어와서 불탄 도성을 정리하고 전재민을 구호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594년 좌의정으로서 해주에 있는 왕비를 호종하다가 객사하였다. 성품이 중후관대하고, 의리를 위하여 기개를 굽히지 않았으며, 시문에 뛰어났고 장서가 많았다. 유저로는 '송당집' 4권이 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