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황세정(黃世楨)
  • 회덕황씨(懷德黃氏),  출생~사망 : 1622 ~ 170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주경(周卿). 호는 제곡(霽谷). 조부는 장악원주부(掌樂院注簿) 황영남(黃穎男)이고, 아버지 황덕윤(黃德潤)은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1750년(영조 26) 경오식년문과(庚午式年文科)에 급제하였으나 일찍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고령박씨(高靈朴氏)로 선교랑(宣敎郞)을 지낸 박공(朴珙)의 딸이다. 3세 때 부친을 여의자 종숙모(從叔母) 조씨를 따라 고향 회덕에 내려와 자랐다. 6세 때 처음으로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밑에서 글을 익혔으며 9세 때는 당시 재상 이었던 최명길(崔鳴吉)에게 강목(綱目)을 배웠다. 이후 동춘당의 큰 아들 송광식(宋光○)과 함께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에게서도 수학하였다. 1656년(효종 7) 여러 선비들이 추천하여 영릉참봉(英陵參奉)과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3년 뒤에 다시 교관(敎官)을 제수 받았다. 그 후 벼슬을 버리고 연기(燕岐)로 돌아와 조그만 집을 지었는데 우암이 '제곡유거(霽谷幽居)'라는 네 글자를 써 보내오자 그것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평소 윤휴(尹○)와 가까웠는데, 기해년 복제(服制) 문제로 우암과 동춘당이 관직이 추삭되고 유배당하자, 그 억울함을 알리고 반대파들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로 인해 곧바로 진도에 유배되었다. 1680년(숙종 6) 유배지에서 돌아와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를 지내다가 공조좌랑(工曹佐郞)이 되었다. 그 뒤 연풍현감(延豊縣監)으로 부임하였다. 1694년(숙종 20) 가을 문생들이 그의 공적을 상소하여 벼슬을 청하니 통정(通政)의 품계와 첨추(僉樞)의 직을 하사받았다. 1701년(숙종 27) 다시 판서 김창집(金昌集)의 추천으로 가선(嘉善)의 반열에 오르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1705년(숙종 31) 2월 23일 향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 이듬해 4월 전의(全義)의 사촌(沙村)에 부인과 합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