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정서(廷瑞). 판중추부사 행(荇)의 아들이다. 1540년(중종 35)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1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에 발탁되고, 1543년에 저작, 1544년에 부수찬, 정언 등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 하고, 1545년에 지평, 교리를 역임하였다. 이해에 이조정랑으로 재직중 을사사화가 일어나 많은 사림이 화를 입자, 당시 권신이던 숙부 이기(李○)를 비판하고 이황(李滉), 정황(丁○) 등 많은 선비들을 구하여주었다. 1549년(명종 4)에 병조정랑으로 재직시 안명세(安名世)에 대한 가죄논의(加罪論議)가 일어났는데 이기의 전횡을 비난한 일로 임백령(林百齡)의 탄핵을 받아 장류(杖流), 강계에 안치되었다가 이황 등 많은 사류의 상소로 풀려났다. 이때 노수신(盧守愼), 유희춘(柳希春), 김난상(金鸞祥), 유담(柳湛) 등과 함께 복직되어 영흥부사에 이어 사인, 판교, 공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