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8년(선조 21)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7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99년 북청판관으로 있다가 형장(刑杖)을 남용한 죄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체직되고, 1602년 예조좌랑에서 체직되었다. 1605년 경기좌도경차관(京畿左道敬差官)을 지냈으나 답험(踏驗)의 부정으로 다시 체직되었다가 곧 영천군수를 제수받고, 1607년 형조정랑이 되었다. 1614년(광해군 6) 호조좌랑을 지내기도 하였으나, 이후 벼슬을 하지 않다가 인조반정 이후 복직되었다. 1626년(인조 4)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로 재직중 조정의 예의를 지키지 않고 제례를 그릇되게 시행하였다는 탄핵을 받기도 하였으나, 1628년 유효립(柳孝立)의 모반사건에 공을 세워 영사공신(寧社功臣)에 녹훈되고 양릉군(陽陵君)에 봉하여졌다. 이후 판서 에까지 올랐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저서로 '수색집' 8권 4책이 있다.
1588년(선조 21)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7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99년 북청판관으로 있다가 형장(刑杖)을 남용한 죄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체직되고, 1602년 예조좌랑에서 체직되었다. 1605년 경기좌도경차관(京畿左道敬差官)을 지냈으나 답험(踏驗)의 부정으로 다시 체직되었다가 곧 영천군수를 제수받고, 1607년 형조정랑이 되었다. 1614년(광해군 6) 호조좌랑을 지내기도 하였으나, 이후 벼슬을 하지 않다가 인조반정 이후 복직되었다. 1626년(인조 4)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로 재직중 조정의 예의를 지키지 않고 제례를 그릇되게 시행하였다는 탄핵을 받기도 하였으나, 1628년 유효립(柳孝立)의 모반사건에 공을 세워 영사공신(寧社功臣)에 녹훈되고 양릉군(陽陵君)에 봉하여졌다. 이후 판서 에까지 올랐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저서로 '수색집' 8권 4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