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장(子長). 호는 무하옹(無何翁).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 익희(益禧)의 아들이다. 1522년(중종 17)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저작을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이해 3월에 발생한 이장(李璋)의 장가사건(長歌事件)에 연관되어 사관직(史官職)을 교체당하였다. 이어 홍문관정자, 춘추관설서를 거쳐 1537년 검토관이 되고 헌납, 지평, 호조좌랑을 역임하였다. 군기시정(軍器寺正)으로 '중종실록' 편수에 참여하고, 그뒤 대간으로 권신 윤원형(尹元衡)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외직으로 밀려나 경성부사, 평양소윤 등을 거쳐, 회양, 삭주, 원주, 의주, 성주 등의 목사를 역임하였다. 평양에는 그의 선정을 기념하는 유애비(遺愛碑)가 세워졌다. 뒤에 참의에 이르렀다. 그는 기국(器局)이 준정(峻整)하고 조행이 정확하였으며, 격탁양청(激濁揚淸)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사람을 추천하고 탄핵하는 데 어려움을 회피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무하옹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