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응희(李應禧)
  • 전주이씨(全州李氏),  출생~사망 : 1579 ~ 165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수(子綏). 호는 옥담(玉潭). 부친은 여흥령 이현(李玹) 이고 모친은 평산신씨(平山申氏)이다. 14세 때 부친상을 당하고 2년 후인 1594년(선조 27)에 조모상까지 당했다. 이후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업을 이어가며 학문과 예절에 정열을 다 쏟아 원근에서 그 덕망을 칭송하였다. 광해군 때에 이이첨(李爾瞻)이 인목대비를 폐위하고자 꾀할 때 크게 상심하여 백의항소(白衣抗訴)로 간곡히 만류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경기도 과천 수리산 아래에 은거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의 학식이 고명함을 알고 중용하려 했으나 거듭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선조인 안양군(安陽君)이 연산군 때 원사(寃死)를 당하면서 유언으로 관직에 나아가지 말라고 하여 그 유훈을 따른 것이라 한다. 슬하에 7남 2녀를 두었는데 7형제가 모두 진사에 급제하였는데, 모두 두(斗)자 항렬이라 주위에서는 칠두문장가(七斗文章家)라고 칭송하였다. 생전에 저술이 많았는데, 병자호란 때 방화로 모두 소실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저서로는 '옥담유고(玉潭遺稿)', '옥담사집(玉潭私集)' 등이 있다. 고향에서 류순인(柳純仁), 심부(沈溥), 류우인(柳友仁), 안홍제(安弘濟), 송규(宋珪), 이원득(李元得), 이경일(李敬一), 한덕급(韓德及), 안중행(安重行) 등과 함께 시계(詩契)인 향로계(享老契)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묘는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 산 195번지에 있었는데, 1993년 경기도 화성시 봉담면 상기리로 이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