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수(子粹). 호는 서포(西浦). 사간 소(紹)의 손자로, 사재감정(司宰監正) 응천(應川)의 아들이며, 금주군(錦州君) 정(炡)의 아버지이다. 1589년(선조 22) 28세에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으며, 여러 벼슬을 거쳐 병조좌랑이 되었다. 그뒤 남포현감으로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는데, 논공행상에 그를 시기하는 사람이 있어 제외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현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켰다. 그뒤 성균관전적, 직강, 예조좌랑, 병조좌랑, 사복시정 등을 차례로 지내고, 경기도사, 수안군수에 이어 인천, 부평, 남양 등의 부사를 지냈는데 가는 곳마다 치적이 있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그를 대사간에 임명하자 그의 패륜행위를 못마땅히 생각하여 사양하였으나 참의로 임명되었다. 이어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613년(광해군 5)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 반대하고 시골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인조반정으로 대사간이 되었으며 이듬해인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병조참의로서 인조를 모시고 공주로 피난갔다가 난이 평정된 뒤 돌아와 가선대부로 대사헌이 되었고, 이조참판을 거쳐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모시고 강화로 갔으며, 형조판서, 좌참찬, 우참찬, 지돈령부사, 지중추부사 겸 지경연사, 지의금부사, 춘추관사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늙고 병든 몸으로 왕손을 호종하고 강화, 교동, 호서 등지로 피난하였다가 난이 끝난 뒤 한성에 돌아와 좌참찬이 되었다. 저서에 '서포기문 西浦記聞'이 있다. 시호는 정헌(貞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