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서(子恕). 호는 농은(農隱). 조부는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윤황(尹煌)이며, 아버지는 윤선거(尹宣擧)이다. 풍양조씨(豊陽趙氏) 군수(郡守) 조진양(趙進陽)의 딸과 결혼하여 두 아들, 윤자교(尹自敎)와 윤가교(尹可敎)를 낳았다. 둘째 부인은 전의이씨(全義李氏) 이유(李○○)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가학으로 학덕을 닦았다. 나이 30세에 병에 걸려 10년 동안 고생하다가, 1668년(현종 9)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전시(殿試)에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모친상을 당하여 출사하지 않고, 스스로 농은(農隱)이라는 호를 짓고 전야에 파묻혀 일생을 보내려 하였다. 이후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으려 하였다. 1681년(숙종 7) 장흥고주부(長興庫主簿)로 임명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정산현감(定山縣監)에 제수되었다. 그 이듬해인 1687년 선친이 무고를 당하자 벼슬을 버렸다. 1689년 다시 석성현감(石城縣監)에 임명되었으나 우계(牛溪)와 율곡(栗谷)이 문묘에서 퇴출되자 곧 다시 벼슬을 버렸다. 1694년 용담현감(龍潭縣令)에 제수되었다. 1695년 청렴 근신한 수령으로 뽑혀 예빈시정(禮賓寺正)으로 승진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696년 청송부사(靑松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706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임명되었으나 곧바로 공격(公格)으로 체직되었다. 1707년(숙종 33)에 죽리(竹里)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그 이듬해 1월 25일 공주(公州) 남목동(南木洞) 향두산(鄕斗山)에 묻혔다. 저서로는 문집인 '농은유고(農隱遺稿)'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