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인길(仁吉). 세준(世俊)의 아들이다. 오윤겸(吳允謙), 김상용(金尙容)과 함께 파산(坡山)에서 성혼(成渾)을 사사하였다. 1582년(선조 15)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기축옥사가 일어나 호남의 선비들이 연루되자, 소를 올려 그 억울함을 말하여 반대파의 미움을 샀다.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으니 반대파가 벌하고자 하였으나 이항복(李恒福)의 도움으로 영암의 서호(西湖)로 돌아갔다. 37세로 죽으니 주변의 사람이 모두 애석히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