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한필원(韓必遠)
  • 청주한씨(淸州韓氏),  출생~사망 : 1578 ~ 166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원이(遠而). 호는 도천(道川).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효중(孝仲)이며, 어머니는 감찰 이언형(李彦亨)의 딸이다. 1605년(선조 38)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장의(成均館掌議)로 있을 때 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에 반대하는 정인홍(鄭仁弘)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였다가 한때 광해군을 노하게 하였으나 이항복(李恒福), 이정구(李廷龜)의 변호로 무사하였다. 선교랑(宣敎郞)으로서 1616년(광해군 8)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저작, 봉상시직장을 역임하였으나 폐모론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으며, 뒤에 주서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였다. 인조반정 후에는 충청도선유어사(忠淸道宣諭御史)로 나간 바 있고, 이듬해인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는 공주로 왕을 호종하였다가 난이 끝난 뒤 병조좌랑, 정랑, 성균관직장을 역임하고, 정언, 집의 등 8년 동안 대간으로 봉직한 뒤 통정으로 승계하여 동부승지, 우부승지, 병조참지, 여주목사를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을 잘 지켰기 때문에 가선(嘉善)으로 승계되고, 예조, 병조, 형조의 참판과 한성부서윤 등을 역임하였으며, 효종 때에는 역시 예조참판, 도승지, 특진관, 부호군 등을 역임하였다. 그뒤 가의(嘉義)에 승계하여 1660년에 죽었다. 성품이 안온하여 직언은 하지 않으면서 왕의 덕을 잘 보필하였고, 교결(皎潔)의 명성을 떨치지는 않았으나 행위가 깨끗하였으며, 이름난 학자는 아니나 어리석음을 능히 깨우친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