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옥여(玉汝). 호는 묵재(默齋). 세조 조의 문신 석형(石亨)의 5대손으로, 영의정에 추증된 정화(廷華)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이이(李珥),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명을 떨쳤으며, 1582년(선조 15)에 생원이 되었다. 이듬해 일부 문신들이 이이와 성혼을 공박, 모함하여 두 유현(儒賢)의 처지가 위태롭게 되자 여러 선비들과 함께 글을 올려 논변하여 스승을 구원하였다. 1592년에 강릉참봉(康陵參奉)으로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가(御駕)가 서행(西幸)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기를 땅에 묻고 능침에 곡읍하고 물러나와 의병을 모집하여 황정욱(黃廷彧)의 진중으로 갔다가 다시 어가가 주재하는 평양으로 가서 청죄(請罪)하고 방어대책을 아뢰었다. 이어 이덕형(李德馨), 이항복(李恒福) 등의 주청으로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에 임명되어 군사를 모집, 이천으로 가서 세자를 도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이듬해에는 숙천행재소로 가서 왕에게 회복대책을 진언하자, 왕이 후하게 상사(賞賜)하고 다시 삼도선유관(三道宣諭官)에 임명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명나라 군중에 군량을 수송하게 하였다. 그는 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을 도와 각 읍으로 순회하며 군졸을 모집하고 양곡을 거두어 개성으로 운반해서 서울 수복전을 크게 도왔다. 그뒤 장성현감,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 김제군수를 역임하면서 난후수습에 힘썼다. 1603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형조좌랑, 안산군수,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 배천군수 등을 역임하고, 1616년(광해군 8)에 숙천부사 로서, 해주목사 로부터 무고를 받고 수감된 최기(崔沂)를 만나본 일로 탄핵을 받아 이천에 유배되었다. 1619년에 풀려나와 1622년에 평산부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개탄하고, 김류(金○), 신경진(申景○), 최명길(崔鳴吉), 김자점(金自點) 및 두 아들 시백(時白), 시방(時昉) 등과 함께 반정의거를 준비하였다. 이듬해 3월에 광해군을 폐하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綾陽君) 종(倧)을 왕으로 추대, 인조반정에 성공하여 김류, 이서(李曙), 심기원(沈器遠), 김자점, 신경진, 최명길, 이흥립(李興立), 심명세(沈命世), 구굉(具宏) 등과 함께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그뒤 호위대장(扈衛大將),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우참찬, 대사헌, 좌찬성 등을 역임하고,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그동안 남한산성의 수축, 호패법의 실시, 무사의 양성, 국방을 충실히 할 것 등을 건의하여 국력강화에 힘썼다. 1626년(인조 4) 병조, 이조의 판서를 지내고, 이해에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인헌왕후(仁獻王后: 元宗妃)의 상기를 만 2년으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대간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이듬해 정묘호란 때에는 왕을 강화도에 호종하여 최명길과 함께 화의를 주장하다가 다시 탄핵을 받았다. 당쟁이 치열하고 명, 청 관계의 외교가 복잡한 시기에 일신의 안위를 잊고 나라를 위하여 공헌한 바가 컸다. 저서로는 '묵재일기' 3권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