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영보(榮甫). 호는 성산(聖山). 이조판서 팽숙(膨叔)의 증손이며, 사운(思雲)의 아들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에 홍문관정자로 등용되어 국가문서를 맡아서 처리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의 호종(扈從)보다 직접 적과 싸우기로 결심하고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휘하로 달려가서 금산전투에 참가하였다. 그 싸움에서 아군이 패하게 되자 이듬해 의병장 고종후(高從厚)와 함께 다시 의병을 모아 진주성으로 달려갔다. 그해 8월, 지난 번 그곳에서 참패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총병력으로 공격해오는 왜군과 처절한 혈전을 벌이다가 끝내 성이 무너지려 하자 판결사 김천일(金千鎰), 동료 고종후와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뒤에 병조참의에 증직되고, 정문(旌門)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