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정지연(鄭芝衍)
  • 동래정씨(東萊鄭氏),  출생~사망 : 1527 ~ 158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연지(衍之). 호는 남봉(南峰). 영의정 광필(光弼)의 증손으로, 봉상시정 유인(惟仁)의 아들이다. 일찍이 이중호(李仲虎) 로부터 학문을 배워 그 문하에서는 가장 명망이 높았으며, 뒤에 이황(李滉), 서경덕(徐敬德), 성제원(成悌元)의 문하에 출입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뒤, 1566년 선조가 세자로 있을 때 이황의 추천에 의하여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다. 1569년(선조 6) 의금부도사로 재직시 나이 43세에 이르러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이조좌랑, 지평, 부교리, 헌납, 집의, 직제학 등을 지내면서 청론(淸論)을 벌였다는 칭송을 들었다. 그뒤 대사성, 대사간, 대사헌을 거쳐 1581년 우의정에 올랐으니, 관직에 나온 지 15년 만에 정승자리에 오른 예는 흔히 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1583년 신병이 깊어짐에 따라 거듭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그 역시 병중에서도 글로써 국사(國事)를 논의하다가 그해 57세로 죽었다. 죽음에 이르러 왕이 대신할 인물을 천거하라고 하자 이산해(李山海)를 천거하였고, 또 유소(遺疏)로 이이(李珥)를 인재로 천거하였는데, 특히 이이의 장단점을 잘라 말한 다음, 그의 기질을 적절히 알아서 쓴다면 나라에 큰 이익이 될 것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