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19일(금) 己亥年 辛未月 丁巳日 ♬ 즐겨찾기에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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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혈, 명당 사례연구 HOME > 풍수 > 명혈, 명당 사례연구
  • 풍수지리의 원리나 결과를 검증하고 규명하는 방법은 어느 가문의 과거와 현재의
    기록인 족보를 근거로 대조해 가며 확인하는 방법도 실효를 거둔다.
언성군 김중만 장군대좌의 실증
  • 1996년 초여름 조선말엽의 무신 언성군 김중만 장군을 만나보기 위해 안성땅으로 향하였다. 사당에 들러 사당참배를 마치고 큰 길을 다시 나와 고삼저수지 쪽으로 조금가다 큰 다리를 건너니 왼편으로 들판길이 나오는데 이 길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1km쯤 가면 양성면 방축리가 나온다는 묘소는 마을을 지나 언덕을 넘어 비교적 한적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멀리서 바라보아도 산세가 웅장하고 생기가 있어 보였다.
  • 솔밭속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니 산 기슭에 광산김씨의 묘가 몇 기 있고, 그 뒤로 능선 최상부에 남향으로 분묘가 하나 있는데, 봉분은 큼직하게 가꿔져 있으나 어찌된 일인지 석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첫눈에 보아도 그 자리가 장군대좌임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혈처가 높아 전후좌우가 시원하게 트였는데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이 맞은편 남쪽을 막고 서있는 말모양의 수려한 산이었다.
  • 패철을 놓고 수구(水口)와 입수(入首)를 살펴보니, 혈후(穴後)가 잘록하게 속인(束咽)이 되어 있고, 혈성(穴星)은 높이 솟아 있는데 명당 밖 수구는 정파(丁破)에 건입수(乾入首)로 복종체(覆鍾體)의 노양혈(老陽穴)이었다. 우선룡(右旋龍)에 좌선수국(左旋水局)으로 간인득(艮寅得)이며 좌청룡이 좀 낮기는 하여도 겹겹이 나성(羅城)처럼 벌여 있는데, 우(右)편으로는 기치사(旗幟砂)의 백호(白虎)가 기세가 등등하게 버티고 있다. 앞쪽으로는 널찍한 명당을 건너 병오방(丙午方)에 천마봉(天馬峰)이 참으로 수려한데, 이를 안산(案山)으로 삼아 임좌병향(壬坐丙向)의 자왕향(自旺向)을 하였으니 당대에 장군이 아니나오고 어쩌겠는가?
  • 김중만 장군의 조부묘를 얻어 쓰기까지의 일화가 재미있어 소개해보면, 김장군의 부친은 어려서부터 집안 형편이 어려워 초막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길을 가던 중 행색이 초라한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노승이 걸린 병은 그 무섭다는 염병이었다. 참으로 난처한 일이지만 젊은 부부는 싫은 내색도 하지 않고 그 스님을 보살펴 주었으며, 많이 회복되어 스님이 길을 나서려고 하면 완쾌될 때까지 보살펴 주겠다하며 극구 만류하였다. 마지못해 주저앉은 노승은 그럭저럭 겨울을 나고 몸이 완쾌되어 젊은 주인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 빈도가 운수가 나빠 몹쓸 질병을 얻어 다 죽게 된 것을 위험을 무릎 쓰고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이제 길을 떠나는 마당에 주인의 소망을 한가지 들어 줌으로써 은혜에 보답하고자 근처에 명당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10년 내에 일천석의 부를 이룰 땅이요 다른 하나는 당대봉군(當代封君)이 날 자리인데 그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이지만 그 젊은이는 그래도 공명(功名)이 좋아 봉군지지(封君之地)를 택하여 스님이 일러 준대로 아버지 묘를 쓰고 아들을 낳으니 이이가 김중만 이었다. 그리고 이곳이, 장군대좌의 명당으로 그 후 수백년을 자손이 번성하고, 벼슬이 많이 나왔다는 것이다.
면면(綿綿)한 복지의 땅 원주원씨(原州元氏) 세거지
  • 횡성군 서원면과 양평군 청운면사이 경계에 있는 금물산으로부터 출맥하여 서남쪽으로 달리던 산맥이 비룡산에서 우선하여 수리봉을 거쳐 이렇다 할 큰 기복 없이 서화고개를 지나 울멍줄멍한 구릉지대를 펼치며 남행하기 삼십여리, 여주시 북내면 장암리에 이르러 전형적인 퇴룡형(退龍形)의 오공승천(蜈蚣昇天) 소달산을 만드니 그 끝에는 천년고찰인 흥왕사가 자리하고 소달산 서편 평탄한 개활지에는 음양택을 함께 갖춘 원주원씨 시중공파의 사백여년 영화의 터전이 있다.
  • 계축으로부터 임감으로 점차 들고 일어선 소달산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주맥이 갑묘, 을진으로 완만한 기복을 거듭하며 들녘 가운데 와서 행도를 멈추고 엎드렸는데 왼편으로는 야트막한 청룡가지가 만궁형으로 감돌아 철통같이 수구를 관쇄한 중에 금성체 고은 봉우리가 막아서니 바람한점 물 한 방울 들고 날 틈이 없게 풍을 막아주어 현규(玄竅)를 살피자면 을입수(乙入首) 양생룡(養生龍), 해임득(亥壬得) 경파(庚破)로 묘가 되어 있고 동구안의 들판은 넓고도 비옥하여 삼십여 가구가 자급하고도 남을만하다.
  • 마을 한가운데는 매년 음력 10월 12일에 조상들께 제사를 올리는 사당 소산사(蘇山祠)가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마을에 15대 사백여년을 세거하는 원씨들은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던 시중공 원익겸(元益謙)공의 후예로 뒷산 내룡에는 이 마을 입향조 원중육(元仲稑)공의 묘를 위시하여 그 증손인 충장공 원호(元豪),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공신이 된 원유남(元裕男)과 원두표(元斗杓)정승 부자와 그 이후 10여대의 묘소가 능선을 따라 내리 계장되어 있다. 입수이후 래룡이 비록 웅장하지는 않으나 청수하기 이를데없고 드넓은 명당안으로는 용마루가 길직한 농가들과 새로 지은 양옥들이 즐비하다.
  • 이마을 원씨중에는 역대로 출중한 무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임진왜란을 당하여 패잔병과 의병을 규함, 여주신륵사에서 왜적을 섬멸한 충장공 원호(元豪)는 문무를 겸전한 명장이다. 그는 일찍이 선조초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경원부사(慶源府使)로 있으며 니탕개(尼湯介)의 침입을 격퇴하기도 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패주하는 왜병을 선산 구미포(龜尾浦)에서 섬멸하여 그 공으로 여주목사겸 강원도 방어사가 되었는데 마침내 금화지구 전투에서 전망하고 후일 병조판서와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 원씨문중의 걸출한 인물은 현종조에 좌의정과 대제학을 역임한 원두표(元斗杓)이다. 그는 아버지 원유남(元裕男)과 함께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운후, 원평부원군이 되었고 훈련대장과 대제학을 거쳐 좌의정에 오른 인물이다. 그역시 문무를 겸비한 명상으로 인조반정당시 창의문을 도끼로 깨부수고 입성하였다고 하여 세인들로부터 “도끼정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밖에도 감사와 수사같은 중직을 역임한 인물들이 다수 배출되었는데, 그 후예들은 이곳 북내면 장암리뿐만 아니라 여주일원에 삼백여호에 이르는 호대한 씨족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 여주 북내면은 남한강 이동에 위치하여 북으로는 양평군 지제 양동면과 인접하고 남으로는 강천면에 연했는데 주위에는 서북으로 우두산과 고래산이 있고 동쪽에는 당산과 관모봉이, 남에는 보금산과 사깟봉이 들러있어 경관이 빼어나고 토질이 청정하며 인정은 순후하고 사람살기에 쾌적하니 장차 전원주택지로서 각광받을 소지가 있다.
동래정씨 시조 안일호장(安逸戶長) 정문도공(鄭文道公) 묘
  • 간단없는 사화와 당쟁으로 무수한 선비가 도륙이 되고 명멸하는 국운과 더불어 사대부 집안의 부침이 무상하던 조선조 오백여년의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이렇다할 풍파나 환란 없이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 198명이나 되는 문과급제자중 상신(相臣)을 무려 17명, 판서 20여명, 대제학 12명, 청백리를 21명씩이나 배출한 가문은 동래정씨 말고는, 가위 왕반이라 할 수 있는 전주이씨를 제외하면 흔치 않을 터이다.
  • 신안동 김씨가 지금의 청운동인 장동에 모여 살면서 문벌을 이루어 장동김씨로 불리어 왔듯이 동래정씨는 조선중기 이후 남산 밑 회현동에 대대로 세거하며 혁혁한 가문을 형성하니 세칭 회동정씨로 불리어 왔다. 필자는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이와 같은 일문의 흥성을 두고 풍수와는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자못 궁금한바 있어 오랫동안 명당대지로 소문이 나있던 부산시 양정동에 있는 정문도(鄭文道)공의 묘소를 어렵사리 기회를 만들어 비로서 찾아가 볼 수 있었다.
  • 한반도의 관문. 부산시 부산진구 양정동 469번지 화지산 밑 자좌오향의 명혈. 여느 명묘와 달리 수도권으로부터 벗어나 국토의 끝자락에 위치한 지리적 사정으로 인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없는 형편이다. 개마고원으로부터 시작하여 왼편으로 동해의 망망한 푸른 바다와 오른편에 낙동강을 끼고, 이리구불 저리꿈틀 남으로 달리던 백두대간이 경주와 포항을 왼쪽에 두고 울산과 양산 어간에서 잠시 머물며 원효산을 일으켜 세우고 다시 남해바다를 향하여 행도를 계속하니 계명봉, 금정산, 상학산을 연이어 만들고 어느덧 만덕고개를 건너뛰어 불웅령에 다다른다.
  • 왼편으로 수영강을 바라보며 여기서 한 가지가 동남으로 떨어져서 부용같이 고운자태 화지산을 이룩하니 그 아래 조선 제일의 명당이라 할 수 있는 지자혈(池字穴)이 맺혀 있는 것이다. 묘소에 오르는 양편으로 조경이 잘 되었고 세가대족의 산소답게 재실이 웅장하고 잘 다듬어져 있다. 사위를 일별하니 득수는 건득병파(乾得丙破)에 자좌오향(子坐午向)을 하였는데, 좌우룡호가 청수하고 환포한 중에 주위의 사격이 특히 수발(秀拔)하니 손사방(巽巳方)에 황령산은 문필이 분명한데 곤신방에 엄광산과 수정산이 기고처럼 중첩하고 맞은편 백호너머로 정방(丁方)에 영도의 봉래산이 그림처럼 다가와 있다.
  • 외명당에는 아파트가 들어찬 도심속이지만 혈장을 에워싸고 감도는 령기는 아직도 심신유곡이다. 조물주의 공력이 새삼 신묘하여 사격을 두고 중언부언하기가 참으로 송구하다. 주룡(主龍)은 자계룡(子癸龍)으로 화지산에서 출맥하여 잠시 동으로 가다, 다시 남쪽으로 좌선하여 유혈(乳穴)로 맺었다. 용정을 가늠하니 부모산인 화지산으로부터 래맥은 풍후하고 수려하나 입수는 결린(結咽)이 미흡하고 돌올하지를 못해 펑퍼짐하게 퍼져있는데 경사가 있고 전대가 부실하여 토축을 쌓고 치산을 하였다.
  • 묘를 쓴지 거의 일천년이나 되어가니 그동안 지형변화가 많았겠지만 대지명혈일수록 한가지 흠결은 피할 수 없는 것인가보다. 혈성의 특징은 혈뒤 양쪽으로 바위가 있어 완연히 혈증을 드러냈는데 마치 눈(眼)처럼 생겼으니, 이로 미루어 굳이 이름을 짓자면, 교룡잠수(蛟龍潛水)가 아닐른지? 예전에는 오른쪽 백호 너머로 산봉우리 셋이 일렬로 있어서 전체 형국이 마치 못지자(池字)모양을 하여 지자혈(池字穴)이라 하였는데 최근 도시개발로 인해 삼수변에 해당하는 봉우리는 훼손이 되고 초행자는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 삼수변이 없더라도 청룡에 비하여 백호세가 현저히 왕성하고 백호방에 수려한 봉만이 중중고용하니 장손보다는 지손과 외손이 창성하겠는데 동래정씨 세계를 보면, 이점이 확실한 터이고 특히, 임당공의 외손인 장동김씨는 육십여년이나 영화의 극치를 누리고 허다한 인물이 배출되었으니, 화지산의 음덕과 무관하지는 않을 듯싶다. 더구나 청룡밖으로는 온천천이 내려와 내당수와 합해서 수영만으로 들어가는데, 그 중간에 배산이 가로 막고 있어 북신(北辰)이 도어 생기를 거두어 주니 더욱 가상하다. 어찌 만대영화지지가 아니겠는가?
  • 이 명당이 점혈되기까지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으니, 고려 초기에 개경으로부터 그곳에 부임해온 현령은 공무가 끝나 한가할 때면 화지산 남녁언덕에 올라 주위를 살피고, 멀리 영도의 봉래산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산기슭에 이르러 한참씩 앉아 말없이 있다 내려오곤 하였는데 당시 안일호장으로 현령을 수행하던 정문도공이 이를 눈여겨 보아두었다가 그 현령이 임기가 끝나 돌아간 뒤에 이를 자신의 신후지지로 삼고 사후에 그곳에 묻혔다하니 세상일이 물각유주라 주인이 각각 따로 있는바, 그 원은 말없는 가운데 길안내를 해주고 간 것이다. 이곳에 정문도공이 묘를 쓴 후, 대대손손 자손이 번성하였다.
청송심씨(靑松沈氏) 삼한국부인(三韓國夫人) 안씨(安氏) 묘
  • 수도권 일원은 물론 전국에 산재해 있는 명묘치고 풍수지리책에 소개되지 않은 땅이 거의 없을 정도로 여러 차례씩 거듭 언급이 되었으나, 유독 풍수사나 글 쓰는 이의 관심밖에 멀리 있는 명당이 하나 있으니 곧 청송심씨 안효공 심온(沈溫)의 부인되는 삼한국부인 순흥안씨의 묘소이다. 청송심씨 안효공은 곧 세종대왕의 국구(國舅)이고 순흥안씨는 빙모(聘母)이시다.
  • 위치는 안성시 금광면 오흥리 금광저수지 위이다. 한반도의 중심을 누비며 보은 속리산에서 떨어진 일맥이 청주 상당산, 청안 칠보산, 음성 마이산을 거쳐 죽산에 이르러 칠장산을 일으켜 세우니, 바로 차령산맥의 시발점이 된다. 칠장산 관해봉(觀海峰)에서 한 가지가 안성 시내를 바라보고 잠시 서북으로 내리다 다시 간인으로 방향을 바꾸어 서남쪽으로 힘차게 내달리던 용절이 어느덧 다시 한번 우선하여 임감맥(壬坎脈)을 이루어 마디마디 구슬을 꿰듯 봉만을 세우고, 지각과 송영을 놓으며 기세 좋게 남으로 가다 일의대수(一衣帶水) 맑은물을 만나 행도를 멈추니, 우선룡에 좌선수국이라 좌우의 용호는 더없이 환포유정하고 맞은편으로 차령산맥의 연봉들은 그림같이 아름답기 그지없으니 목국(木局) 정미파구(丁未波口)이다.
  • 입수로부터 거슬러 오르며 격룡을 시도해 보았지만 임감, 계축, 건해가 몇 마디나 되는지 도무지 그 끝간데를 모르겠다. 오인의 천견(淺見)으로는, 수도권 일원에서 이만한 용맥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을 듯싶고, 지리학에 뜻을 두고 심룡하는 이라면 반드시 답산을 권해볼만한 진귀한 룡이다. 음택으로 말하자면 뭐니뭐니해도 용맥이 우선 아닌가. 수구(水口)가 지지파인 것이 아쉽기는 하나, 용혈사수에 특별히 흠잡을 것이 없으니 이 또한 만대영화지지가 분명하다. 혈성은 겸중유돌(鉗中有突)로 비교적 높이 져있고 간인득(艮寅得)에 미파(未破), 임좌병향(壬坐丙向)을 하였으니 자왕향으로 제격이다.
  • 앞에는 청정하기 이를데없는 금광 저수지가 가로놓여 있어 안성시민의 젖줄이 되니 풍광이 또한 볼만하다. 청천부원군 심온정승의 묘는 수원시 이의동 신갈 안산간 고속도로 동수원 진입로 옆에 있고, 이 부인의 묘소도 당초에는 이의동에 있던 곳을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다. 청송심씨는 조선조 오백여년을 통하여 190여명의 문과급제자중 상신(정승) 13명, 문형(文衡) 11명, 왕비 3인, 그밖에 청백히 22명을 배출하면서 언제나 정치권의 중심에 있어왔으니 전국을 들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거족이다.
보은(報恩)의 땅, 곡성(谷城)의 세우와용(細雨臥龍)
  • 전남 곡성군 오산면 가곡리 남록에는 여말(麗末)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의 한 분인 순은(醇隱) 신덕린(申德隣) 선생의 묘소가 있다. 고려가 망하자 유신칠십이인은 태조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하는데 반대하여 두류산 밑에 은거하여 세상일에 담을 쌓고 두문동이라 하였는데, 전국으로 분산되었다. 이때 순은은 역시 두문동칠십이인의 한 사람인 아들 호촌 신포시와 더불어 광주 서석산을 거쳐 남원 땅으로 피하여 살다가 그곳에서 졸(卒)하였는데, 아들 신포시가 부친상을 당하자 임시로 초빈(草殯)한 후에 인근지역(隣近地域)으로 구산(求山)을 하러 나섰다.
  • 이곳저곳 여러 달을 헤매다가, 옥과(玉果)땅, 지금의 오산면 가곡리에 다달아 주위 지세를 살펴보니 산색이 수려하고 지가가 윤택한데, 여러 줄기 산내룡이 늘어지니 가운데 정기가 응결된 혈처가 하나 있었다. 신포시(申包翅)가 울창한 숲 속, 어우러진 가시덤불을 헤치고 주봉에 올라 형세를 관망하니 검장산에서 출발한 산맥이 분마처럼 북으로 치달려, 오기봉을 세 후에 다시 동북방으로 해서 갑묘로 박환한 후 회룡고조하여 계축으로 입수가 되었는데 왼편으로 본신청룡이 학슬, 봉요로 중중하고 오른쪽으로 백호가 다정하게 머리를 숙여 엎드렸다. 인갑득에 신파. 여기에 묘고향으로 계좌정향을 하면 좋기는 더없이 좋겠는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산 밑에 암자가 있어 그로 인해 묘를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 어느덧 짧은 가을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어 가자 산중에서 난감해진 신포시는 하룻밤을 묵어가기 위해 암자를 찾아들었다. 이때 암자에는 수도하는 스님이 다섯 사람 있었는데, 주지는 다행히 나그네에게 유숙을 허락하고 빈방을 하나 내어 주었다. 저녁공양을 마치고 고단한 몸을 쉬기 위해 잠자리에 들려 하는데, 주지스님이 가만히 나그네의 방으로 찾아 왔다.
  • 그는 공손히 합장 배례를 한 후 이렇게 물었다. "영감님께서는 저를 못 알아보시는지요? 제가 바로 개경에 사실 때에 대감님댁 종놈 만득이 옳습니다. 대감님댁이 두문동으로 들어가신 후 쇤네는 갈 곳이 없어 머리를 깎고 절로 들어와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근 이십년 만에 이런 누추한 곳에서 영감님을 뵈오니 그저 감개가 무량할 뿐입니다. 그간 대감님께서는 안녕하신지요?" 신포시가 눈을 들어 자세히 보니 실로 얼마만인가 예전에 개경에 살 때 집에서 부리던 젊은 노비 아이가 아닌가? 그때서야 반색을 하며 눈이 어두워 미처 못 알아보았음을 사과하고 그간 고생이 얼마나 많았겠느냐고 위로의 말을 하였다. 이리하여 나그네와 스님은 옛 이야기를 하며 오래간만에 회포를 푸는 중, 스님은 신포시에게 어찌하여 그곳까지 이르렀는지를 물었다.
  • 그는 남원 땅에 와서 부친상을 당하고 구산을 하러 다니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사실과 이 암자 뒤에 쓸만한 자리가 하나 있기는 한데 앞에 절이 있으니 쓸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스님은 신포시에게 다가가 앉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영감님 그러시다면 주저 마시고 소망대로 대감님을 이리로 모십시요. 나머지는 소승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오늘날 쇤네가 비록 불자가 되어 있으나 저희 부자가 개경에서 사는 동안 후덕하신 대감님의 은혜를 두터이 입었는데 오늘에야 그 은혜에 보답하게 되나 봅니다."하고 헤어졌다.
  • 그런 후, 얼마 있어 주지스님은 스님들을 다른 곳으로 보낸 후 암자에 불을 지르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마당에는 칠층탑만 남아있게 되었다. 그런 뒤에 신포시가 그곳에 부친 순은공을 장례하니, 이곳이 바로 세우와룡(細雨臥龍)의 명당으로 고려신씨는 이후로 조선조에서 상신 3인에 대제학 3인, 부마 2인, 91명의 문과급제자와 103명의 무과급제자를 배출하는 융성을 보였다.
엽전 삼천냥에 백학은 날아가고
  • 충남 서산시 음암면 문양리에는 간대산이라는 단아한 명산이 있다. 이 산은 동남쪽 가야산에서 서북으로 뻗은 산맥이 이십여리를 진행하며 상왕산, 동암산, 은봉산을 거친 후 마지막으로 솟구치어 서해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을 맞으며 내포일원의 낮으막한 구릉지대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중 간대산 서쪽가지가 흘러내리다 멈춘 곳에 증 이조참판 전의이공의 묘소가 있다.
  • 이 묘는 손사득 신파에 을입수 묘좌유향을 하였는데, 맞은편으로는 경태방에 퇴미산, 신술건해방에 문길산과 임감방에 자모산 등 수려한 봉만이 둘러서 있어 제법 조망이 좋아 보이나 아쉽게도 왼편으로 청룡허리가 낮아서 멀리까지 내다보인다. 혈장주위에는 둥글둥글한 바위무더기가 2단으로 석축을 이루었는데, 석축 위로는 토심이 깊고 지각이 발달하여 일견 천혈(天穴)임을 알 수 있다.
  • 이 묘소에 관하여는 인근지역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조선조 말엽 현종, 철종년간에 이 고장에는 전의이씨 선비하나가 살고 있었다. 평소 심성이 순량하고 효행이 돈독한외에 자질이 총민하여, 경사와 문학에 밝았으나 어찌된 셈인지 과거는 볼 때마다 떨어져서 자연 집안은 가난하고 조석간데가 없게 되었다. 한편 당시에 내포일대에는 풍수에 전통한 가권(賈勸)이란 스님이 있어서 인근에 명혈을 많이 소점해주며 선행을 하고 다니는 중이었다.
  • 어느 날 가권스님은 이 선비댁으로 탁발을 하러 들러보니 선비의 처지가 너무나 간구한 것을 보고 넌지시 제안을 하였다. "선비님같은 인품과 재주를 가지시고도 뜻을 못 얻어 허구헌날 이처럼 고생만 하시다니, 매우 뵙기 민망합니다. 소승이 한군데 쓸만한 땅을 보아둔 곳이 있는데, 그곳에 묘를 쓰시고 일후에 발복을 하신다음 폐백으로 엽전 삼천냥만 주실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 자리는 장후 3년이면 대과급제를 하고 5년 이내에 뫼산(山)자 들어가는 고을의 원(사또)를 하시게 될 터이니 그리 아시고 부디 약속을 저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하였다.
  • 그리하여 급한김에 선비는 폐백 삼천냥을 후불로 하기로 하고 택일하여 가권스님이 지정하는 장소에 부친산소를 모시게 되었다. 그로부터 3년 후 연전연패 낙방만 하던 과거시험에 보기 좋게 급제를 하였다. 꿈만 같았다. 가권스님의 예언이 적중한 것에 놀라고 감사하였다. 과거급제 후 조정내직에서 미관말직으로 2년여를 보낸 후 드디어 이선비 아니, 이주부는 아산현감을 제수받았다. 허구 많은 지방 수령중에 뫼산자가 붙은 아산현감 이라니 이주부는 놀랍기만 하였다. 그러나 한편 사또는 속으로 가권스님에게 폐백 삼천냥 지불할일이 여간 난감한 것이 아니었다.
  • 본인이 받는 녹봉에 비하면 삼천냥이란 이만저만 거금이 아니어서 부정행위를 하지 않고는 쉽게 조달할 수 없는 액수이었다. 지방수령을 제수받은 기쁨도 잠깐이고 자나 깨나 폐백 줄 일이 걱정이었다. 도임한 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 사또는 병방아전을 불러 지시하되 관아문을 지키는 군졸에게 명을 내려 불문곡직하고, 스님의 관아출입을 일체 금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로부터 삼사삭이 지난 어느 날 아산관아에는 드디어 가권스님이 나타나서 본관사또의 면회를 요청하기에 이르렀으나, 문을 지키던 군리는 지시받은대로 스님의 출입을 금지하는 동시, 그를 밖으로 밀어내어 멀리 쫒아 버렸다.
  • 이 같은 처사가 본관사또의 계획된 수작이란 것을 모를리 없는 가권스님은 이내 고샅으로 나가 목로주점에 가서 곡차를 흠씬 마시고는 이 골목 저 골목 돌아다니며 혼잣말로 투덜거리는 것이었다. "흥! 내가 돈이 욕심나서 찾아온 줄 알고 문전박대를 하지만, 중놈이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나. 사또가 복이 그만이라 망년된 짓을 하는 거여. 5년 전만 해도 내가 공부가 부족하여 감사가 나올 자리를 그르쳐서 고작 현감을 만들고 말았는데, 지금이라도 한 금정(金井)만 올려 쓰면 감사 한 자리는 따 놓은 당상일 것을 쯧쯧..." 어쩌고 하며 큰소리로 떠벌이는 것이었다. 이때, 사또는 이속으로부터 웬 스님하나가 와서 사또 면회를 요청하는 것을 거절하여 보냈다는 보고를 받고는 통인을 시켜 스님의 뒤를 밟게 하였다. 그자가 무슨 소리를 하고 돌아다니는지 알아오라는 것이었다.
  • 통인놈이 돌아가서 들은 바대로 보고하자 사또는 감사가 될 수 있다는 말에 또 다시 구미가 발동하였다. 그는 통인을 앞세우고 스님을 찾아 나섰다. 사또는 스님을 보자, 대사께서 오신 줄 모르고 아랫것들이 무례를 저질러서 대단히 송구하다는 것과 이왕 이곳까지 오셨으니 객사로 들어가셔서 하룻밤 묵어가시기를 청하였다. 이에 가권스님은 사또를 따라 관아로 들어간 뒤 폐백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은 채 자신의 부족으로 감사가 나올 자리를 현감에 그치에 하였으니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과와 함께 묘소 위쪽으로 한 금정만 올려 쓰면 반드시 감사가 나올 수 있으니 가급적 빠른 시일내에 면례를 하자는 것이었다.
  • 욕심이 앞을 가린 사또는 자기의 소행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가건스님이 권하는 대로 날을 택일하여 부친산소를 이장하기에 이르렀다. 서산 음암에서 아산까지는 얼마 되지 않는 거리어서 일을 속히 진행시킬 수 있었다. 이장을 하는 날은 날씨마져 청명한데 동네사람과 친척들을 동원하여 새벽부터 부산하게 움직였다. 드디어 파묘를 하고 횡댓장을 떠드는 순간 “펑”하는 소리가 나며 하얀 백학 한 마리가 솟아오르더니 푸른 하늘을 향하여 너울너울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모든 사람이 넋을 잃고 바라보는데 일이 잘못된 줄로 짐작한 사또가 가권스님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온데간데없어지고 솔숲 사이로 높은 산꼭대기 어디에선가 “엽전 삼천냥 떠나간다”는 소리가 메아리도 없이 들려왔다. 만사가 휴의였다. 파던 묘를 부랴부랴 다시 메웠지만 사또는 어딘가 찜찜하였다. 혹자는 봉황새가 날아갔다고도 한다.
  • 이상은 야담과 실화가 아닌 전설과 실화 중간쯤 되는 이야기로 믿거나 말거나 이다. 사또도 사또이지만 약속을 어겼다고 보복을 한 가권스님도 스님으로서 온당한 처사는 아닐 것으로 본다. 날아간 학은 언제쯤이나 다시 돌아올지 모르겠으나 지금도 그 묘소에 올라보면 래맥이 중후장대하고 주변산세가 빼어나서 앞으로도 계속 좋은 여음이 있을 것만 같다. 지리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전의 이공의 후예들에게 길이 무궁한 발복이 있을 것을 기원한다. 참고삼아 이 묘소의 후예중에는 민주당 때 서산에서 참의원을 역임한 이기세공이 있어 가문의 영광을 다시 한번 드러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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